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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하길, 철학가 공자 그는 누구인가?

by 선한 사람 알비 2024. 6. 17.

공자가 말하길 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공자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2024년에 사는 우리들이 공자라는 인물의 말을 듣고 인생 나침반을 삼아 살아가는 것일까? 공자에 대해 알아보자.

 

공자 또는 공부 자라고 하는 유교의 시조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 교육자이고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였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비슷한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부르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삼황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었다. 이름은 구, 자는 중 너이다.

"공자"의 호칭에서 "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 지성 문선왕에 추정되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 취푸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행 추 읍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친 안정제 사이에 태어났다. 숙량흘과 그의 본처 기씨 사이에는 아홉 명의 딸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첩과 낳은 아들 공치는 다리에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에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안정제를 맞아 낳은 아들이 공자이다.

인에 기반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주유하며 군주들을 설득하였으나, 오직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만을 노리는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 상을 받아 주는 제왕이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공자가 교육에 활용한 경전은 '육예' 또는 '육경'이라 불리는 '역','시','서','예','악','춘추'이다. 당시 육경은 진귀한 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속수 이상을 예물로 가져온 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문 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창작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고문 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개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자 이전에도 육경의 이름들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예술이 있고 난 뒤에야 단순한 점술서, 잡기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춘추'를 비롯한 종래의 사관들 기록을 바탕으로 공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치관인 정론을 끌어내었고 맹자는 이를 '춘추의 대의만은 공자가 은연중에 취했고' 춘추를 정명으로 귀결시키면서 '난신적자를 두렵게' 했다고 평하였다.

공자의 말년에 아들이 백서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 연과 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때 공자는 "하늘이 날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 백서가 사망하자 공자가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에서 배워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훌륭히 이어 나갔다.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 집인 《논어》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논어를 알아야 한다.